계영배(戒盈杯)는 가득하는 것(盈)을 경계(戒)하는 술잔(杯)이다.
최인호 장편소설 <상도>에서 이 계영배가 등장한다.
소설 <상도>는 2001년 10월부터 50부작으로 TV드라마로도 방영된 적이 있는데 주 내용은 순조 때 일개 점원에서 조선 최대 거상이 된 임상옥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임상옥은 스승인 석숭 스님에게서 3가지 물건을 받게 된다.
석숭 스님은 인생 최대의 어려움에 당면했을 때만 열어 볼것을 당부하면서 임상옥에게 2장의 비기와 한 개의 잔을 건네준다.
그 세번째의 물건이 석숭 스님이 사용하던 잔이었는데 석숭 스님은 이 잔이 임상옥이 마지막 위기를 극복하게 해줄것이라 했다. 임상옥은 나중에 정말 이 계영배로 인생 최대의 위기를 넘기게 된다.
처음에 임상옥은 석숭 스님이 자신에게 건낸 평범한 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하다가 나중에 그것이 신묘한 잔임을 깨닫게 되면서 계영배를 늘 곁에 두고 자신의 욕심을 다스렸다.
그는 장사를 할 때도 이익을 적정선에서 조절했으며, 흉년에는 곡식값을 올리지 않고 오히려 가난한 백성들을 도왔다.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아야 한다'는 그의 좌우명은 바로 이 계영배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
이쯤에서 계영배에 알아보기로 한다.
계영배의 모양을 보면 윗부분은 받침에 술잔을 얹어 놓은 거처럼 생겼지만 아래쪽은 주전자처럼 생겼다.
다른 술잔과 다르게 가득 채우려고 할수록 오히려 밑의 구멍으로 술이 흘러가 버린다.
현대의 과학적인 원리로 이 술잔을 설명하자면 '사이펀'의 원리로 술을 많이 채울수록 술이 아래로 빠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계영배 안쪽을 보면 일반 잔과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잔 높이의 7부쯤 되는 관이 중심 부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술이 7부 능선을 넘었을 때 바닥의 구멍으로 흘러버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숨어 있다.
술이 잔에서 일정 높이만큼 올라와 있다는 것은 그 높이일 때 관 안의 대기압과 액체의 압력이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다 술의 높이가 관의 높이, 즉 7부 지점을 넘어서게 되면 술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정점을 넘어 긴 관으로 술이 이동한 후에는 액체의 압력이 중력의 방향과 같아지면서 계속 아래로 흐르게 된다.
거기에 더해 일단 물이 빠지기 시작하면 관 내부는 술이 빠져나간 것만큼 진공이 생기고, 바깥과의 기압차가 생기면서 잔 내부의 술이 모두 관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렇기 때문에 7부를 살짝 넘긴 후 술 따르는 것을 바로 멈추더라도 술은 바닥의 구멍으로 모두 빠져나가 버리는 것이다.
'공자'가 제나라 '환공'의 사당을 찾았을 때 그가 생전에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 사용한 의기를 보았다고도 한다.
'환공'은 이를 늘 '곁에 두고 보는 그릇'이라고 하여 '유좌지기( 有坐之器)'라고 불렀다.
'공자'도 이를 본받아 항상 곁에 두고 스스로를 가다듬으며 과욕과 지나침을 경계하였다고 한다.
'무소유'를 저술한 법정 스님은 연잎에 맺힌 물방울을 보며 비슷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연잎의 물방울이 모이다가 어느 순간 연못 아래로 털어버리는 모습이 마치 계영배처럼 자연스러운 비움의 미학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무소유'에서 법정 스님은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라고 했다.
계영배는 단순한 잔을 넘어 욕심과 절제의 경계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면 도리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라는 경고를 통해 삶에서 균형과 적당함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을 준다.
우리 인생 또한 마치 이 고요한 술잔처럼 비워야 할 때를 알고 절제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넘침을 경계하며 삶의 적정함을 유지하는 자세야 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지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절제와 넘침을 경계하기 위해 우리들 마음속에 계영배와 같은 잔하나 두고 살아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리고 그 잔이 넘치지는 않은지 늘 살피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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